일본정부는 인력부족, 고령화, 지역소멸 등 일본이 직면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계 전반의 ‘디지털전환’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과 공급망 교란 위기를 겪으며 디지털전환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의 안정 공급이 화두에 떠오르게 됐다. 이에 일본은 자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 회복과 반도체 공급망 재구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적 지원에 나서고 있다.

특히 내각부와 경제산업성의 주도로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이 수립(`21년), 개정(`23년)되고,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이 제정(`22년)된 이후, 일본은 정부 정책자금과 공공 투자기관을 활용한 대형 투자, 기업인수 및 재편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일본의 존재감을 회복하고, 특정 국가에 편중된 공급 구조를 다변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사례① - ‘라피더스’ 전폭 지원 나서는 日

대표적 사례가 바로 라피더스이다. 라피더스는 도요타자동차, NTT, 소니그룹 등 일본 대기업 8개사가 출자하고 일본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는 반도체 제조사이다. `27년부터 첨단 2nm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신에너지산업종합개발기구(NEDO)의 R&D사업 보조금 약 1조7000억 엔(`24년 누계 기준)을 지원받았다. 민간과 정부의 지원을 토대로 라피더스는 공장부지 건설에 착수한 이후 올해 EUV 반도체 노광장치 반입 등 주요 생산설비 도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7월경부터는 웨이퍼 성능을 확인할 수 있는 파일럿 제품 생산을 추진할 예정이라 밝혀, 초기단계의 환경정비는 어느 정도 완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라피더스에 대한 지원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24년 11월 일본정부는 「AI·반도체 산업기반 강화 프레임」을 발표하고 “AI와 반도체 분야에 `30년까지 총 10조 엔 이상의 공적자금 지원을 추진”, “향후 10년 간 50조 엔의 민-관 투자를 도모할 것”임을 공표했다. 이후 올해 4월, 일본 참의원에서도 독립행정법인 정보처리추진기구(IPA)를 통한 반도체 제조기업 대상의 자금 출자, 현물 출자, 융자 채무보증을 수행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개정했다.

<일본 「정보처리촉진법」 개정사항 도식>

[자료: 홋카이도신문]

현지 언론에서는 사실상 라피더스를 지원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라는 평가가 많다. 실제 라피더스가 2nm 반도체 양산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약 3조 엔에 달하는 자금 수요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아직 민간 출자 규모가 73억 엔 수준에 그쳐 대부분을 정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족한 자금은 정책 지원으로 충당하고, 민간 금융기관을 통한 채무도 정부가 보증하여 라피더스의 양적 성장을 뒷받침할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사례② - 핵심 반도체 기업 인수에 나선 JIC

산업혁신투자기구(Japan Investment Corporation, 이하 JIC)는 일본 정부가 2018년에 설립한 공공 투자기관으로, `09년 관-민 출자로 설립된 INCJ(구, 산업혁신기구)가 그 전신이다. JIC는 일본 산업계의 중장기 경쟁력 확보를 목표로 전략 산업에 대한 투자를 실시하고 있다. 설립 초기에는 바이오산업과 에너지 분야를 중심으로 투자를 진행했다. 하지만 `21년부터 반도체 산업이 전략 산업으로 급부상하면서 관련한 투자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 JIC가 단순한 금융 지원에 역할이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의 산업정책을 연결하는 전략적 투자자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JSR 인수는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의 JIC가 수행한 대표적인 투자 인수 사례로 꼽힌다. JSR은 반도체 회로 형성 공정에 필수적인 고부가가치 화학 소재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이다. `23년 3월 당시, JIC는 JSR 주식의 전량 매수를 추진했고, 인수에 들어간 금액은 약 1조 엔 규모로 추정됐다. 이듬해인 `24년 6월, JIC는 JSR의 도쿄 증권거래소 상장폐지를 결정하여 인수 절차를 마무리했다.

<JSR의 판매이익 및 해외비중 추이>

[자료: 각 사별 홈페이지]

또한, JIC는 지난 `23년부터 추진해 온 후지쯔의 자회사 신코덴키(신광전기공업)의 주식을 후지쯔로부터 인수하는 절차를 올해 3월 완료했다. 신코덴키 역시 반도체 제조에 꼭 필요한 고성능 기판 ‘FC-BGA’ 제조 부문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3위인 대표적인 기업이다. JIC는 후지쯔가 신코덴키 관련 주식을 JIC에 전부 매각하는 형식으로 인수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에 따라 JIC는 신코덴키의 지분 80%를 확보하게 되어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인수 당시 매수액은 약 8000억 엔 규모로 추정됐다.

사실 JIC는 과거에도 후지쯔의 반도체 자회사 구조조정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당시 후지쯔는 수익성이 악화된 일부 생산거점을 정리하고 핵심 기술과 인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는데, JIC는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정부 및 이해관계자 간 조정을 통해 안정적인 산업 전환을 유도했었다. 이처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시장 점유율이 높은 자국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한 JIC의 사례는 JIC가 단순한 투자기관을 넘어 일본 정부의 산업육성정책을 연결,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코덴키의 회계연도별 매출액 추이>

[자료: 각 사별 홈페이지]

시사점

정책지원, 법 개정, 민-관 펀드 활용 등 일본의 반도체 산업 지원과 재편 움직임은 국가 주도의 전략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소재, 부품, 장비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기술 통합을 유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경제안보 차원의 전략적 불가결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엔화 약세 상황에서 외국기업의 자국기업에 대한 공격적 M&A를 사전에 방지하고, 공급망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정책적 판단도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정부의 산업정책에 대해 일부 비판의 여론도 존재한다. 일간공업신문은 “산업보호, 기술유출 방지 등을 위한 대응은 필요하나, 국가의 관여가 지나치게 강해질 경우, 그 경계감이 커져 비즈니스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의견을 제시했으며, 일본경제신문도 “국회 심의과정에서 정부가 최대 주주로 활동하여 기업에 대한 과도한 관여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전략적 육성 기조는 중장기적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라피더스를 중심으로 한 첨단 반도체 생산 역량 강화와 JIC를 통한 핵심 소재·부품·장비 기업 인수 및 재편 움직임은 일본 반도체 생태계의 구조적 변화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본의 반도체 산업 정책 변화와 기업 재편 동향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며, 이에 대한 대응 방안 또는 새로운 협업 기회를 모색, 발굴하는 전략적 접근이 요구된다.

자료: 내각관방, 경제산업성, 홋카이도신문, 일본경제신문, 일간공업신문, 주간 동양경제, 블룸버그, JIC, JSR, 신코덴키 등 각 사별 홈페이지, KOTRA 도쿄무역관 자료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