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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세르비아인들의 강한 자존심
  • 외부전문가 기고
  • 세르비아
  • 베오그라드무역관 박윤
  • 2017-12-01
  • 출처 : KOTRA




조상연 Carefree 대표


눈앞의 이익을 져버리고 자존심을 택하는 세르비아인


세르비아에서 생활하다 보면 갖가지 상황에서 이곳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당장의 이익을 쉽게 져버리는 경험을 자주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사무실에서 운영비 지출 관련 지출처와의 금액 협의 과정에 문제가 생겨 담당 현지직원을 꾸짖었을 때 그 직원은 즉시 본인이 해당 지출 금액을 부담하고 퇴사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 업무협의를 하고 계산할 때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나와서 음식 주문을 담당했던 현지직원을 꾸짖었더니 본인이 음식비용을 내겠다고 단번에 잘라 말했다. 이 두 가지 상황에 발생했던 비용은 현지인들의 급여 수준과 비교했을 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대신 돈을 내겠다고 선언하며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다.


발칸반도에 자리한 국가 중 가장 많은 인구와 군대 그리고 강한 외교력을 보유한 세르비아 사람들과의 생활에서 자주 겪게 되는 이들의 '강한 자존심'에 대한 배경을 알아보자.


세르비아의 아픈 근대사: 내전, NATO공습, EC 경제 제재, 무능한 독재자


과거 냉전시대의 사회주의 국가 중 경제, 외교, 문화를 주도했던 유고슬라비아[남쪽(JUGO-YUGO)이라는 슬라브어와 슬라브 민족(SLAVIA)의 합성어로 1929년 왕국명칭에서 기원]는 1991년 6월~1995년 12월까지의 내전과 1999년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무슬림에 대한 세르비아의 강한 탄압에 대해, NATO의 80일간 폭격으로 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1992~2000년까지 유럽공동체(EC)의 경제적 제재를 받으며 국가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픈 과거가 있다.


과거 독재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쉐비치(Slobodan Milosevic, 1941~2006년)와 그를 추종하는 독재 정치권력을 이용한 사회화를 거치며 막대한 국가의 부가 소실됐다. 이후 들어선 민주 세력은 강력한 개혁의 주도자인 조란 진지치(Zoran Djindjic, 1951~2003년)가 암살당한 이후 개혁 드라이브는 사라지고 자중지란에 빠지면서, 유고슬라비아의 경제는 지속적인 퇴행을 겪게 됐다. 이는 현재까지도 세르비아 경제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2006년 세르비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남아있던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현재의 세르비아 국명이 탄생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한 세르비아 제국(13~14세기 중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주무대인 발칸은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서로마 분리 이후 800년 샤를마뉴 1세(Sharlemagne I or Karl der Grosse I, 약 740~814년)의 신성로마제국의 설립 이후에도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에서 제국의 명칭을 바뀜)의 강한 영향을 받은 곳이다. 10세기 중반~11세기 불가리아 제국의 성장으로 비잔티움제국은 위협을 받았으며, 이후 13~14세기 중반 세르비아 제국의 성장으로 비잔티움은 그 존립에 위협을 받게 된다. 세르비아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비잔티움 황제는 새롭게 성장하는 오스만터키의 도움을 요청하고 자연스레 발칸지역에는 터번을 두른 이슬람 세력이 진출하게되는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게 됐다.


당시 세르비아는 두샨황제(Stefan Uros IV Dusan Nemanjic, 1308~1355년, 1331~1355년 재위) 역사 이래 최대의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하고 비잔티움을 강하게 위협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두샨 황제의 사후 자식 간 통치권 분쟁을 겪고, 이후 세르비아 제국은 분열과 동시에 세로운 세력인 오스만터키의 침략을 받게 되며,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벌판에서 세르비아인들의 향후 500년을 결정짓는 전투가 치뤄졌다. 코소보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1912년까지 세르비아는 오스만터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 기간 세르비아인들은 지속적으로 터키인들에게 저항을 하게 됐다.

 

Uros Perdic 1919년작, 부상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코소보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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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왕 라자르가 이끄는 1만2000~3만 명의 군대와 오스만 슐탄 무라드 1세가 이끄는 2만7000~4만 명의 군대의 치열한 전투 결과 세르비아왕과 군대가 전멸하게 됐으나, 승전한 무라드가 전장을 순시하는 중 사망자 사이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인이 무라드를 살해함으로써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코소보 전투가 패배가 아닌 승리 또는 무승부라는 의식이 자리를 잡아 코소보 전투의 무용담이 전설로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게 됐다.


19세기 오스만터키의 쇠퇴와 민족주의 그리고 1차 세계대전


19세기 유럽은 민족주의를 빼고는 유럽인들이 대화 진행이 안 될 정도의 민족주의가 이들의 사고와 결정을 짓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이다.


신대륙 진출을 통해 정부의 중앙집권화와 부를 축적한 서유럽과 달리 오스만터키는 지중해 한쪽에 치우친 지리적 여건으로 세계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화에 빠져 있던 시기가 지속됐다. 이후 1876년 흑해 진출을 목표로 하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발칸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이를 틈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현재의 보스니아를 지배하게 되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내의 슬라브족은 이에 저항했다. 강력한 민족주의로 뭉친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은 지하단체의 가브릴로 프린찌프(당시 18세)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1914년 6월 28일(코소보 전투와 날짜가 같음) 암살함으로써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공군의 베오그라드 공습으로 세계1차 대전이 발발했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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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의 결과 세르비아는 승전국의 지위로 전후 국제회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이후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티토(Josip Broz Tito, 크로아티아계, 1892~1980년)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의 활약으로 파시즘에 저항하는 슬라브족의 영웅심을 더욱 크게 만들고 이는 종전 후 승전국가의 지위로 영토 배분에 참여함으로써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주의 또는 자긍심은 더욱 크게 자리 잡게 된다.


NATO공습 후 승전 선언: 미국 저항에 대한 승리의식 도취


마지막으로 세르비아인들이 치른 전쟁은 코소보 사태로 인해 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25일까지 있었던 NATO의 일방적인 세르비아 공습이다. NATO의 미국이 주도하는 막강한 최첨단 무기로 베오그라드, 코소보는 물론 세르비아 전역의 주요 건물에 가해지는 폭격을 겪게 됐다. 종전과 동시에 NATO와 세르비아 정부는 동시에 승전을 선언함으로써 승패가 갈리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을 맞게 된다. 이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약소국이 강대국에 저항해 전쟁을 승리했다는 의식으로 발전해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라는 막강한 자부심을 더욱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지나온 세르비아인들의 아픈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들이 강대국 사이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본인들이 반드시 이긴다는 강한 믿음, 그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는 강한 의식이야말로 세르비아인들이 그 어떤 민족보다 자존심이 강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 이 원고는 외부 글로벌 지역전문가가 작성한 정보로 KOTRA의 공식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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