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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폭등에 드러난 한계… 필리핀 ‘석유 자유화법’ 재검토 본격화
- 경제·무역
- 필리핀
- 마닐라무역관 강병훈
- 2026-04-20
- 출처 : KO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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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 급등에 속수무책… 가격 통제 공백·전략비축유 부재 한계 노출
유가 상승이 소비자 부담에 직격탄… ‘완충장치 없는 자유화’ 구조적 취약성 드러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세계 석유 위기에 대한 정부 대응에 관한 연설, 말라카냥궁>

[자료: INQUIRER.NET, 2026.03.27.]
필리핀 석유자유화법(Oil Deregulation Law)은 무엇인가?
필리핀의 석유 산업 자유화법인 공화국법 8479호(Republic Act No. 8479, Downstream Oil Industry Deregulation Act of 1998,이하 RA 8479)는 1998년 제정된 법으로, 석유 다운스트림 산업에 대한 정부의 가격 통제 권한을 폐지하고 시장 경쟁 체제를 도입한 제도이다. 이 법은 공정한 가격 체계와 안정적 공급을 바탕으로 환경 친화적이고 고품질의 석유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석유 산업을 자유화하고 경쟁 시장을 구축하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법의 핵심은 국가가 직접 가격을 통제하던 체계에서 벗어나 경쟁을 촉진하고, 신규 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유도하며, 민간 투자를 활성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안정적 공급과 합리적 가격 형성을 달성하겠다는 데 있다. 실제로 자유화 이전에는 에너지규제위원회가 환율과 수입 원유 가격을 기준으로 석유 가격을 결정했고, 정부가 운영하는 유가안정기금(Oil Price Stabilization Fund, 이하 OPSF)이 원유 수입 가격 변동분을 흡수해 소비자 가격에 즉시 반영되지 않도록 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당시 체제는 가격 조정 과정이 공청회 등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시장 대응이 늦었고, 신규 사업자 진입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따라 자유화 이후 필리핀 석유 시장은 과거 소수 대형 사업자 중심 구조에서 더 많은 사업자가 참여하는 경쟁 체제로 전환됐다. 다만 정부의 역할은 가격을 직접 조정하는 주체에서 국제 유가 및 국내 유가 동향 모니터링, 품질 관리, 기준 미달 판매업체 단속 등 제한된 감독 기능으로 축소됐다.
중동 전쟁으로 인해 드러난 석유 자유화법의 구조적 취약성
최근 중동 전쟁에 따른 국제 유가 급등을 계기로, RA 8479가 안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필리핀은 동남아에서 가장 자유화된 석유 시장 중 하나로 평가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가격 완충 장치와 비상 대응 수단은 매우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현행 체제가 소비자 보호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적절한지에 대한 재검토가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필리핀 에너지부(DOE) 수도권(NCR) 유가 비교: 중동 전쟁 발발 직전 대비 4주차>
유종
전쟁 전 가격대
(2/24~3/2)위기 4주차 가격대
(3/24~3/30)상승폭
(최저~최고)
상승률
Super Premium Gasoline
(RON 97/100)₱52.20 ~ ₱77.03
₱86.90 ~ ₱111.10
₱34.07 ~ ₱34.07
약 34%
Premium Gasoline (RON 95)
₱50.00 ~ ₱74.03
₱84.99 ~ ₱108.90
₱34.99 ~ ₱34.87
약 43%
Regular Gasoline (RON 91)
₱49.00 ~ ₱63.49
₱84.00 ~ ₱101.20
₱35.00 ~ ₱37.71
약 43%
Regular Diesel
₱48.00 ~ ₱65.39
₱105.00 ~ ₱131.90
₱57.00 ~ ₱66.51
약 49%
Premium Diesel
₱56.80 ~ ₱73.61
₱119.50 ~ ₱140.20
₱62.70 ~ ₱66.59
약 50%
Kerosene
₱77.40 ~ ₱98.89
₱140.00 ~ ₱166.79
₱62.60 ~ ₱67.90
약 45%
[자료: GMA News,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List of NCR Pump Prices, 2026.03.31.]
* 필리핀 유가는 정부 고시제가 아닌 시장 자율가격제로 운영되며, RA 8479에 따라 각 석유회사가 국제 유가·환율 등을 반영해 자율 결정한다. 통상 매주 월요일발표, 화요일 적용 방식이 업계 관행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국제 유가 충격이 국내 소비자 가격에 거의 즉시 전가되는 구조라는 점이다. 현행 체제에서는 글로벌 원유 가격이 오르면 필리핀 내 주유소 가격 역시 곧바로 인상된다. 석유 기업들은 현재 보유 중인 재고를 실제 구매 당시 가격이 아니라 향후 수입할 물량의 비용을 기준으로 현재 판매 가격을 책정하는 이른바 대체원가 방식(replacement cost accounting)을 적용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가격 책정 방식일 수 있지만, 교통비와 물가 상승을 직접 체감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현실과 괴리된 구조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추가 유가 인상을 앞두고 필리핀 케손시티의 한 주유소에서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대기하는 모습>

[자료: Daily Tribune, 2026.04.07.]
또 다른 구조적 문제는 전략비축유 부재다. 필리핀은 정부가 직접 보유하는 전략비축유가 없고, 민간 기업이 보유한 상업 재고에 의존하고 있다. 3월 20일 기준 원유 30일분, 석유제품 15일분이었으며, 전체 석유 공급량은 약 45일분 수준으로 파악됐다. 이는 법정 필요 수준을 상회하는 수치이지만, 국제에너지기구가 권고하는 최소 기준인 90일에는 크게 못 미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는 공급 충격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시장에 즉시 개입해 가격을 완화하거나 공급을 안정시킬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이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높은 수입 의존도 역시 문제의 본질로 지목된다. 필리핀은 에너지 수요의 상당 부분을 중동산 원유 및 관련 제품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공급망 차질에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중동 분쟁이 확대되자 정부는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는 물론 미국, 캐나다, 러시아, 남미 등 대체 공급선을 다면화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으나, 이는 비용 상승과 원유 품질 차이에 따른 정제 조정 부담을 수반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제도적 한계도 분명하다. 샤론 가린 필리핀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이하 DOE) 장관은 가격 상한제 도입 여부와 관련해, 법 개정이나 긴급 권한 부여가 없는 한 DOE는 현행 자유화법상 가격을 직접 통제할 권한이 없다고 인정했다. 가린 장관은 정부는 가격 상한제보다는 과도한 이윤 추구 행위를 억제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중동 분쟁 상황을 틈타 가격을 인상한 혐의로 54개 주유소에 소명 명령을 내렸고 밝혔다. 다만, 이런 조치는 가격 구조 전반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후적 감시에 가깝다는 한계가 있다.
<필리핀 운송단체(MANIBELA) 전국 3일간 운송 파업 돌입, 메트로 마닐라 케손시티>

[자료: ABS-CBN, 2026.04.15.]
정치권에서도 현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하원은 석유 자유화법 재검토에 착수하기로 했고, 하원 세입세출위원장인 미로 킴보 의원은 “완전히 자유화된 산업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강력한 법 집행과 반독점 체계가 전제돼야 하지만, 필리핀은 그러한 경쟁 집행 역량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상원에서는 빈센테 소토 3세 상원의장이 자유화법 전면 폐지를 추진하는 상원 법안 제1984호를 발의하며 정부의 가격 관리 권한 회복 필요성을 제기했다. 마르코스 대통령 역시 법 폐지나 연료 수입 부가가치세(VAT) 면제 등 어떤 정책 옵션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으나, 현재는 중동 전쟁의 영향에 대한 즉각적 대응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이번 위기를 통해 드러난 현실적 문제는 분명하다. 필리핀 석유 자유화법이 경쟁 촉진과 민간 투자 확대에는 일정 부분 기여했을 수 있으나, 가격 충격 흡수 장치, 전략비축 체계, 강력한 반독점 집행, 정부의 비상 개입 수단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소비자와 경제 전반이 외부 변수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석유 자유화법의 보완 장치(가드레일)는?
필리핀 석유 자유화법의 핵심 쟁점은 자유화 자체를 폐지할 것인지 여부보다는, 시장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위기 상황에서 소비자와 경제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 장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있다. 이에 따라 가격 급등 완화, 공급 안정성 확보, 취약계층 보호 등을 가능하게 하는 이른바 ‘가드레일(guardrails)’ 도입을 통해 제도를 현대화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거론되는 보완 장치는 비상 가격 안정 메커니즘이다. 전쟁, 공급망 붕괴, 급격한 페소 약세 등 비정상적 상황에서 정부가 한시적으로 가격 밴드나 가격 상한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는 평시에는 시장가격 체계를 유지하되, 급격한 가격 폭등이 교통비·식료품·생필품 가격 전반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완충장치 역할을 하게 된다.
두번째는 가격 결정 구조의 투명성 강화다. 국회와 전문가들은 석유기업의 가격 산정 방식이 보다 명확하게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재고 비용, 운송비, 수입 원가, 마진 등 세부 가격 구성 요소 공개를 의무화하면, 가격 인상이 국제 유가 상승에 따른 불가피한 조정인지, 혹은 과도한 이윤이 포함된 것인지 보다 명확하게 검증할 수 있다.
세번째는 DOE의 감독·조사 권한 강화이다. 현행 법 아래에서 DOE는 주로 가격 동향과 품질을 모니터링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단순 모니터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가격 인상 행태를 더 깊이 조사하고 필요 시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실제 경쟁이 작동하는 시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독점 집행, 가격 담합 감시, 부당 가격 인상 점검이 함께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네번째는 전략비축유 구축이다. 이번 중동 전쟁 영향을 통해 드러난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필리핀이 정부 차원의 전략비축유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는 민간 기업의 상업 재고에 의존하고 있으나, 이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충분한 완충 기능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필리핀 국영 석유기업(Philippine National Oil Company, 이하 PNOC) 등을 중심으로 정부가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비축유를 구축해 위기 시 저가 공급, 시장 안정, 공급 보완에 활용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결국 석유 자유화법의 보완 장치는 자유화 체제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시 정부의 개입을 통해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여야 한다. 특히 국제 정세가 불안정할수록 이러한 보완 장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시사점
이번 중동 전쟁의 여파로 나타난 유가 급등 국면은 필리핀 석유 자유화법이 과거 경쟁 촉진과 민간 투자 유도에는 일정한 성과를 냈더라도, 외부 충격 발생 시 소비자 보호와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제 유가 상승이 필리핀 국내 가격에 즉각 반영되는 구조, 정부의 직접 가격 개입 권한 부재, 전략비축유 미보유, 높은 수입 의존도는 필리핀 에너지 정책의 핵심 리스크로 재확인됐다.
향후 정책 논의는 단순한 폐지 여부를 넘어, 자유화 체제를 유지하되 위기 시 작동할 수 있는 보완 장치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에 집중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가격 안정 장치 도입, 가격 산정 구조의 투명성 강화, DOE의 감독·조사 권한 확대, PNOC 중심의 전략비축유 구축 등이 핵심 과제로 여겨진다. 동시에 재생에너지 확대와 수입선 다변화 등 에너지 자립 기반 강화 논의도 병행될 것으로 보인다.
대외경제 및 기업 실무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필리핀 시장은 향후 석유 가격 결정 구조, 세제, 보조금, 비축 의무, 수입 정책 등에서 제도 변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에너지·물류·제조·유통 전반의 비용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필리핀 진출 기업과 수출 기업은 단기적으로는 유가 및 물류비 변동성 확대에 대비하는 한편, 중장기적으로는 관련 법 개정, 에너지 정책 전환, 공급망 재편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자료: The Manila Times, INQUIRER.NET, BusinessWorld, GMA News, Manila Bulletin, Daily Tribune, 필리핀에너지부(DOE) 및 KOTRA 마닐라무역관 자료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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