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정부, 2030년까지 전력 송전망에 136억 유로 투자할 계획 발표

스페인 생태전환부는 지난 9월 12일, 2030년까지 국내 전력 송전망에 약 135억9000만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계획은 초고압망의 수용 능력을 기존 2000MW에서 2만7700MW로 14배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전체 투자 규모는 2025~2030년 기간 135억9000만 유로다.

이번 전력망 투자 계획은 그간의 정책 방향과는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태양광·풍력 등 발전소가 생산한 전기를 전력망에 연결할 수 있도록 ‘발전소 접속’에 초점을 맞췄으나, 앞으로는 데이터센터, 수소 생산 시설, 신축 주거 단지, 철도·항만 등 대규모 전력 소비처의 전력망 접속 수요를 수용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정부는 이번 계획을 통해 총 422건의 전력망 접속 확대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142건은 대규모 신규 소비자를 위한 송전망, 84건은 철도 인프라 관리자(ADIF) 및 항만과 같은 특수 수요자, 나머지 196건은 배전망 보강을 위한 접속 확대다. 이를 통해 스페인은 「2023~2030년 통합 에너지·기후 계획(PNIEC)」의 주요 목표 달성을 뒷받침하고자 한다.

부문별로는 산업 프로젝트(9GW), 그린수소 생산(13.1GW), 데이터센터(3.8GW), 주거 개발 (1.8GW), 철도 전기화(560MW), 항만 전기화(1.2GW) 등으로 수요가 배정된다. 특히 항만 전기화는 선박이 정박 중에도 육상 전력으로 직접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투자 재원은 송전망뿐만 아니라 배전망 강화에도 투입된다. 배전망의 경우 총 5.3GW의 수용 능력 확대가 예정돼 있으며, 전력회사의 투자 한도 역시 기존 GDP의 0.1% 외에 추가로 77억 유로까지 허용된다. 정부가 직접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며, 기업이 자체적으로 투자하되 전기요금 체계 안에서 회수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준 것이다.

또한, 전체 투자금의 최소 10%는 전압 제어와 모니터링 시스템 강화에 배정된다. 이는 지난 4월 28일 스페인 전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에서 드러난 전력망 관리 취약점을 보완하려는 조치다. 더불어 정부는 이번 계획을 통해 전체 송전망의 21%를 보강하고, 특히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신규 송전선로를 구축해 전력 공급 경로를 확충할 예정이다. 또한 6.6GW 규모의 양수식 수력발전 프로젝트도 통합할 방침이다.

급증하는 전력 수요와 전력망의 한계

스페인 정부가 전력망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배경에는 최근 전력망 포화 문제가 있다. 앞서 9월 9일, 주요 전력 기업인 이베르드롤라, 엔데사, 나투르지, EDP는 공동 성명을 통해 “스페인 내 상당수의 전력망 결절점이 이미 포화 상태(83.4%)에 도달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수요를 연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전력사들은 이러한 포화 현상이 “새로운 산업 주체와 프로젝트 등장으로 전력 수요 접속 신청이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배전망 투자가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전력망 포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배전망을 강화하고 디지털화해 전력 수용 능력을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전력사들은 전력망 붕괴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수요가 집중된 지역에 신속히 전력망을 확충할 수 있는 유연한 계획과 절차, 에너지 전환을 저해하는 병목 현상을 제거할 수 있는 조치, 그리고 불필요하게 묶여 있는 용량을 해제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산업·주거·저장장치·전기 모빌리티 등 핵심 수요처를 연결할 수 없게 되고, 재생에너지의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해 전기화가 가져올 경제 성장과 경쟁력 확대가 제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전력망 포화에 따른 위험 신호는 이미 올해 초부터 감지됐다. 스페인 배전사 협회인 AELEC은 2024년 한 해 동안 약 67GW 규모의 전력 접속 신청이 있었으나, 이 중 절반이 거부됐다고 밝혔다. 엔데사 역시 올해에도 비슷한 수준의 접속 신청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이 경우 절반 이상이 거부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시사점

스페인 정부는 앞으로 전력망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단순히 전력 계통의 안정화를 위한 조치가 아니라, 향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스페인은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력 생산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이를 기반으로 향후 유럽 내 새로운 생산 거점으로 부상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5년 7월 보고서에서 “일부 EU 국가는 높은 에너지 가격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다소비 산업을 유지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남부 스페인이나 북부 스웨덴처럼 전기요금이 저렴한 지역에서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즉, 스페인은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한 전기요금 경쟁력이 향후 산업 입지 경쟁에서 중요한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전력 수요가 집중되는 데이터센터 산업은 스페인 내에서 투자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어 전력망 확충이 시급한 상황이다. 스페인 데이터센터협회(Spain DC)는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 관련 투자가 580억 유로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이는 현재 설치된 전력 용량의 약 7배에 해당하는 규모다. 실제로 최근 2년 사이 아마존(157억 유로), 마이크로소프트(19억5000만 유로), 오라클(10억 유로) 등 여러 글로벌 기업들이 잇따라 스페인 내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스페인 전력망 확충은 한국 기업에도 다양한 사업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송·배전망 강화 과정에서 고압 케이블, 변압기, 차단기 등 전력 기자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력망의 디지털화가 추진되면서 스마트미터, 전력 모니터링 장비 등 관련 솔루션 분야에서도 기회가 있다. 더불어 데이터센터, 수소 생산, 철도·항만 전기화와 같은 대규모 전력 소비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이에 필요한 전력 설비와 효율화 기술의 수요도 확대될 전망이다. KOTRA 마드리드무역관이 인터뷰한 스페인 전력 기자재 유통업체 A 사는 “정부의 대규모 투자 발표로 향후 기자재 수요 확대가 기대되는 만큼 한국 기업에도 진출 기회가 열릴 수 있다”라면서도, “다만 현지 시장은 유럽 대형 브랜드가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동시에 중저가 중국산 제품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어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한국 기업이 입지를 넓히려면 차별화된 기술력과 함께 신뢰할 수 있는 현지 파트너십 전략이 필수적이다”라고 조언했다.

자료: Cinco Dias 등 현지 언론, 스페인 데이터센터협회(Spain DC), OECD, KOTRA 마드리드무역관 종합